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서기/한반도 관련 기사 (문단 편집) == 한반도 관련 기사의 해석문 == 일본서기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아주 많은데, 특이한 점은 4세기 이전에는 백제와 관련된 기사는 없고 죄다 신라와 가야 관련 기록이다. 제국주의 시절에 한일동족론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진무천황이 신라인이라는 등의 학설이 아주 많았는데, 일례로 일본 건국 신화에서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인 스사노오노가 먼저 도착한 곳은 신라이고 연오랑 세오녀의 설화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삼국사기에는 도일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 되어있고,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천일창]], 가야왕자 쓰누가 아라시토의 기록도 있다. 언어학적인 부문에서도 신라와 연관이 짙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이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일본은 국가 형성 전부터 백제보다 신라나 가야와 관련이 많다. 애초에 한국의 ‘한’자는 일본어로 ‘카라’라고 하는데 이 ‘카라’는 말 그대로 [[한국 고대국가명의 일본식 독음|가라 즉 가야에서 유래했다]]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서기에서 신라 가야에 집착하는 이유도 일견 납득 할수 있다. 사실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닌게 박혁거세의 신라 건국 신화나 신라 왕실 신화를 보면 일본 열도 출신일 가능성이 있는 --[[석탈해]]--[* 삼국사기의 석탈해의 출신지 비정을 보면, 왜국은 아니다. 저 멀리 홋카이도 즈음으로 파악 할수 있는데, 당연히 그 시절에는 왜국과 하등 관련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왜국 출신인 [[호공(신라)|호공]](瓠公)이라는 인물도 나온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구전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아닌 기록으로 된 한일의 교류도 그 기원이 아주 오래 되었다. 특기할 점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보면 한반도를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일본서기 고사기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일례를 들면 신공황후기 246년의 기사를 보면 왜의 사신들에게 백제의 왕이 그들과 통교하길 원한다면서 보물창고를 보여주며 우리나라는 이렇게 금은보화가 많은데 왜왕에게 바치고 싶다는 등의 서술과 아마테라스의 동생 스사노오가 한향 (韓鄕)은 금은보화가 많은 나라라는 식의 말을 한다. <일본서기> >소잔오존(素戔嗚尊, 建速須佐之男命)[* 아마테라스의 남동생 [[스사노오]]이다]은 그 행상이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므로 신들이 그 벌로 많은 공물로 속죄하도록 하고 소잔오존을 고천원에서 쫓아내었다. 그래서 소잔오존은 그 아들인 오십맹신(五十猛神;이타케루노카미)을 데리고 신라국으로 내려와 증시무리(曾尸茂梨;소시모리)라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서 큰 소리로 “이 땅은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아니다.”라고 외쳐 말하며 진흙으로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항해하여 출운의 파천 상류에 있는 조상봉(鳥上峯;토리카미노타케)에 이르렀다. (중략) 애초에 고사기에는 진구황후는 천일창의 여식에게서 나온 모계 후손이라고 대놓고 나온다. 또 니니기가 큐슈에 강림하며 한반도를 보며 이 땅은 한반도를 향하며 아침해가 비치기 때문에 좋은 땅이라고 말한다. 이를 두고 일본학자들은 대놓고 한국(韓國)이라고 나오는데도 한국의 한자가 한반도를 가르키는게 아니라 중국을 가르키는거라고 곡필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 일본은 건국 신화부터 한반도 특히 신라와 가야와 연관이 깊으며, 도래인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형성 되는데 큰 축을 당담한 것임을 알수 있다. >此地者 向韓國 有真之道通笠紗之御前 又此地者 朝日之直刺國 夕日之日照國也 故 此地甚吉地也 >이 땅은 한국(韓国, 고대 한국)을 향하며, 가사사(笠沙)의 곶까지 원래 있던 길이 있어서, 아침해가 잘 비치는 나라, 석양이 잘 비치는 나라이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좋은 땅이다." <아마테라스의 손주 [[니니기]] (ニニギ)가 큐슈에 강림하며 한 말> 한반도 관련 기사가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유랴쿠 천황]] 와 [[긴메이 덴노]] 치세기이다. 특히 [[유랴쿠 천황]]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일본이 통합되고, 큐슈 기반의 야마타이 국을 중심으로 지방 호족들이 연합체로 모이기 시작했고, 대외관계가 활발해지고 한반도에 용병을 파견하고, 마치 자신들이 유일한 고구려의 맞수이며, 백제 가야 신라 왜의 동맹에서 마치 자신들이 맹주인척 행세하며 '고구려에 대항할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니깐 고구려 좀 치게 군사 좀 원조해주세요' 라고 중국의 황실에 한반도가 마치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고 언론플레이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일본서기의 연대 조작인 이주갑인상이 사라지고 정상의 년도로 복원 된다. 이를 근거로 이주갑인상이란 년도 조작을 한 이유가 열도가 어느정도 통일된 뒤 한반도의 역사와 비교하니 너무 초라하게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서기에서 일본 국내를 다루는 기록은 이주갑인상의 해당 사항이 아니다. 오직 한반도 관련 기록 특히 백제의 기록과 비교 했을때 오차가 생길뿐이다. [* 혹자들은 일본서기의 이러한 노골적인 년도 조작인 [[이주갑인상]]의 증거를 없애려고 백제삼서를 고의적으로 실전 시킨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일본서기가 당대에 외국기사를 인용할만한 문헌이 백제삼서 외에는 전무했다. 중국사서를 인용하자니 5세기 중반까지는 중국과의 교류도 활발하지 못했고, 지방 호족의 구승과 구전만 취합하자니 당대에 문자가 없었던 일본으로써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서기가 일본 국내의 기록이 적고 그에 비해 한반도 관련 기록이 방대한 것을 보면 일본이 당대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 절대적으로 기록의 양이 부족해서라고 해석할수 있다.) 그래서 백제유민들이 갖고 있는 백제삼서를 가져와 인용하되 귀화한 백제인들에게 의해 1차 윤색이 생겨나고 또 이 1차 윤색이 거쳐진 자료들을 일본의 사관들이 인용하면서 2차 윤색이 생겼다는게 중론이다. 다만 백제삼서는 [[정창원]]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음모론적 관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본의 3대 사론서 중 하나인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 14세기)에서는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 같은 동족)의 나라였다.’고 적힌 책이 전해내려 왔는데, 이를 8세기 간무 덴노의 어대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주갑인상은 [[신공황후]]의 집권기부터 시작해서 유라쿠 천황의 시대에서 마무리가 되는데 이 시기는 백제에겐 근초고왕부터 5세기 중반 [[비유왕]]이 죽고 개로왕의 치세기 까지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중흥기인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집권기에 의해 코너에 몰렸던 백제와 그 곤핍한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고 노력했던 백제의 외교 기록등을 기반으로 이들 기록을 악용해 마치 자신들이 백제나 신라보다 우위에 있고 고구려가 백제에게 한 일을 마치 자신들이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끼쳐 전횡을 저지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백제신찬을 인용한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이 기사년 (429년)에 즉위 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이르면 429년은 [[비유왕]]이 즉위한 년도로, 개로왕은 455년에 즉위한다. 보통 당대에 작성된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충돌하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대에 백제인에 의해 작성된 [[백제삼서]]의 기록을 인용했기 때문에 윤색을 걷어내면 꽤 디테일하고 어느면에선 삼국사기보다 더 사실에 부합되는 서술이 많지만, 이 기사만큼은 [[이주갑인상]]을 위해 비유왕의 치세기를 노골적으로 소거 했기 때문에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비유왕이 일본서기에 등장 조차 하지 않는 이유와 추론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비유왕 치세기에는 백제와 왜의 관계가 원할하지 못했다고 언급 했다. 그 이유는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비하여 이 시기에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연합하고 동맹을 강화했는데 이에 왜국이 크게 반발 하였다라는 설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딱 비유왕의 치세기에 (422~455년) 왜왕 제(濟)가 독자적인 외교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백제와 한반도 남부 국가들의 군사권을 요구한 시점이 이 시기이다. 또 비유왕이 일본서기에서 종적을 감춘 다른 추론에는, [[신공황후]] 치세기부터 시작된 이주갑인상이 5세기 중반이 되면서 정상 년도로 돌아가는데 이에 맞물려 불가피하게 사라졌다는 해석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